2026-01-26 11:19:00
내란에 대처하는 태도의 차이. 단두대와 ‘눈사람 키세스’. 하나는 분노와 공포의 폭발을, 다른 하나는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무서운 인내를 보여준다. 왼쪽 사진은 영화 의 한 장면이고, 오른쪽은 지난해 1월6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은박 담요를 몸에 덮은 채 시위에 나선 시민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프랑스 혁명 후 10년 혹은 100년을 쉽게 말하지만,
당시 프랑스 사람들 시간 감각은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일일이 여삼추 같았을 것이다.
한국 시민은 내란 진압의 진전을 고대하며
휴대폰을 놓지 못했고, 살얼음판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당연히 현재 내란 진압은 연착륙되고 있다.
길게 보면 지금은 조선이 국운을 다한 뒤 식민지를 겪고,
6·25와 민간·군사 독재를 거치며 형성된
100년이 넘는 구체제를 넘어서는 시간일 수 있다
위로의 시작
이 경향신문 첫 회 칼럼을 거의 다 썼던 1월21일 오후 2시 넘어, 한덕수의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가 선고되었다. 강의 교재로 쓸 판결문을 만났다는 기쁨도 잠시, 칼럼을 지우고 다시 써야 했다. 많은 이들처럼 가슴에 꽂힌 판결문 문장을 곰곰이 되새겼다. 다음 대목이 유독 가슴에 남았다.
“현재 우리 주위에는 민주적 기본 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거나 이를 파괴하는 시도가 있고, 이미 유효한 구제 수단이 남아 있지 않는 그러한 극단적인 상황에서나 논의되는 저항권을, 평상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하는 사람들, 헌법과 법률에 정한 바 없어 위헌·위법한 주장에 불과한 계몽적 경험, 잠정적 경험, 경고성 경험을 주장하는 사람들, 지난 2025년 1월19일 발생한 서울지방법원 폭동 사건과 같이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위해서는 헌법과 법률을 쉽사리 위반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주의의 근본이 되는 선거제도를 정당한 근거 없이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12·3 내란은 이와 같이 잘못된 주장이나 생각을 양산하거나 그 상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이진관 재판부는 2024년 12월3일 윤석열의 계엄령이 초래할 뻔한 세상을 판결문에 담고, 내란범 중 하나인 한덕수를 단죄했다. 재판부의 말처럼 저런 세상, 즉 ‘누군가 함부로 해도 되는 세상’에 살 수도 있었다. 시민들은 그 위험을 넘어섰다. 12·3 계엄을 ‘위로부터의 내란인 친위쿠데타’로 규정한 이 판결을 통해 나를 포함한 많은 시민들이 위로받고 안도를 느낀 이유일 것이다.
대혁명의 정통성
판결문 중 위 문장에 눈이 갔던 이유는 그간에 겪은 불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2024년 12월3일 불법계엄령 선포, 즉 친위쿠데타의 성격을 띤 윤석열의 ‘위로부터의 내란’ 이후 우리 국민이 겪었던 심신의 고통 때문에 필자는 자연스럽게 과거 프랑스 국민들에게 감정이 이입되었던 듯하다.
마침 하계 올림픽도 파리에서 열렸다. 주최 측은 파리에 혁명의 도시라는 정체성을 부여했다. 나폴레옹 3세가 장기집권을 시작한 제2제정 시기, 오스만 시장은 파리를 재개발하였다. 노동자는 변두리로 내쫓고, 혁명을 진압하기 좋도록 방사성 도로를 완성했다. 말하자면 지금의 파리는 반혁명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 뒤 1889년,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박람회가 열렸다. 그때 자본주의 번영의 상징으로 강철로 만든 에펠탑이 들어섰다. 하나 그 옆에 전 세계에서 강제로 원주민을 끌고 와서 인종 전시관을 열었고, 이렇게 또 한 번 대혁명의 이념을 배신했다. 그랬으면서도 2024년 하계 올림픽은 파리를 혁명의 도시로 선언했으니,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1789년 대혁명의 정통성을 재개발-반혁
명의 도시 파리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의 대공포
대혁명 전, 루이 16세의 전제 왕정은 무리한 재정 지출 등으로 굶주림, 부랑, 소요로 이어지는 민생의 피폐를 초래했다. 1789년 7월, 시민들의 분노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이어졌다. 파리 동쪽 바스티유는 흔히 감옥이라고 하지만 실은 무기와 화약이 보관되었던 곳이다. 시민들은 국왕의 군대와 맞서기 위해 무장하려던 것이었다.
내란 국면에서 파리를 떠올린 건 대혁명 직후 불어닥친 공포와 불안 때문이었다. 꽝꽝 얼었던 봉건체제의 끝자락에 절대왕정이 있었다. 시민들은 이 얼음장을 깼다. 그러나 구체제는 훨씬 뿌리 깊은 시스템이었다. 혁명의 영향으로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정치제도가 구상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혁명의 사상은 은밀히 숨어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해 8월, ‘인권선언’이라고 불리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De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에서 자유, 평등, 우애, 사유재산의 불가침성, 압제에 저항할 권리 등을 천명하였음에도 말이다.
국왕이 복귀해서 판을 뒤집고 시민들을 학살할 가능성이 상존했다. 1792년,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한 뒤 왕정은 사라진 듯 보였다. 국민공회가 보통선거로 의원을 선출하고 공화정(共和政)을 선포했다. 하지만 1794년, 로베스피에르는 ‘근본적인 혁명’을 내세우며 국민공회 안에 반(反)혁명파가 있다고 연설했다. 불안과 기대를 오가는 혁명의 일상에서 피곤과 짜증이 시민들의 심성을 차지하면서 그 근본주의는 악마 같은 폭력성을 드러냈다. 공포정치는 그렇게 탄생하고 확산되었을 것이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구호나, ‘하나님도 없고, 주인도 없다’는 국민공회의 구호를 혐오하며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였다. 훗날 빅토르 위고는 을 통해 내전 중 하나였던 방데 전투를 소재로 왕당파와 공화파의 격렬한 전투를 묘사했다. 그러나 방데 전투는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진 수많은 내란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이 시기를 역사는 ‘목을 자르는 형틀’인 단두대와 함께 기억하고 있다.
불면의 밤을 지나며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 된 것은 혁명 10년 뒤인 1799년이었다. 이후 전쟁은 계속되었고, 1815년 왕정으로 돌아갔다. 혁명에서 반동으로. 역사를 돌아보면 10년, 100년을 쉽게 말하지만, 막상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 감각은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일일이 여삼추, 하루가 삼년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난 이렇게 마음을 달래며 지냈다: “우린 내란 이후 1년도 안 지났다. 파리와 프랑스 시민은 적어도 10년 동안 단두대를 끼고 살았지만”.
그렇다고 다행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계엄군 저지와 계엄 해제, 탄핵과 파면 뒤에도, 윤석열을 비롯한 내란 가담자의 구속영장 기각, 체포영장 집행의 실패, 지지부진한 수사,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부의 내란 연장이 의심되는 행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내란 진압의 진전을 고대하며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고, 살얼음판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조금 길게 보면 지금은 조선이 국운을 다한 뒤, 불행히도 식민지를 겪고, 6·25, 민간 및 군사 독재를 거치는 동안 형성된 이 땅의 구체제를 정리하는 시간일 수 있다. 100년 넘은 구체제를 넘어서는 과정이 순탄할 수만은 없는 것도 당연하다. 훗날 역사가들은 최근 겪은 사건을 100년 또는 그 이상에 걸친 혁명의 시대의 끝자락으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건강한 봄을 맞기
현재의 국면에서 내란 진압은 고비를 넘기며 연착륙되고 있다. 새로 대통령 선거도 치렀고, 특검도 결과를 냈다. 이제 내란범들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조금씩 수습과 회복의 시간이 흘러갔고, 시민들의 일상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안정은 곧 생활 리듬이 있음을 의미한다.
퇴계 이황은, 기득권이 된 반정 세력을 개혁하려다 좌절한 중종 때의 기묘사화(1519), 외척의 발호로 혼란해지던 명종 초반의 을사사화(1545)로 친지와 친형을 귀양살이와 국문 끝에 잃었다. 그리고 그 혼란한 시절에 생활 리듬의 유지에 도움이 되는 두 가지 매뉴얼을 남겼다.
첫째, 닭이 울면 일어나 마음을 정돈하고 몸을 단정히 하며, 잘 때는 잡생각하지 말고 잠만 자라. 둘째, 틈만 나면 스트레칭을 해서 근육과 골격을 부드럽게 해주고, 깊게 호흡해라. 설마 퇴계가… 하는 의심 많은 독자가 계실까 해서 전거를 남겨둔다. 첫째는 10장에 나오고, 둘째는 퇴계가 평생 수련한 에 나온다. 이 매뉴얼을 실천해서 내란의 시간을 끝까지 지혜롭고 건강히 넘어서 보자.
▲오항녕

역사학자. 전주대학교 교수. 인권평화연구원과 율곡국학진흥원 이사. 조선시대 사상사를 중심으로 역사이론, 기록과 기억을 연구하고, 시민들과 함께 고전을 읽는다. 공동체와 공유의 역사 경험이 21세기 희망이라고 본다. 등의 논저가 있다.
*讀史管見 : 역사를 읽는 소박한 눈
오항녕 역사학자. 전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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